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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촬영 그 이후(남원의료원 촬영소개)
작성자 10500009 작성일 2007-07-02 조회수 5141

장마가 시작됐다. 그다지 덥지는 않은데 끈적거리는 느낌이 불쾌하다. 남들보다 유별나게 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장마는 역시 지겹다.

그래도 장마는 곧 끝날 것이고, 무더위가 오고, 어느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가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빨리도 흘러간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달이, 일년이….

장맛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부안 변산으로 향했다. 평일에 일상을 벗어나 훌훌 떠난다는 것, 참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요일 오전이어서인지, 장마의 한복판이어서인지, 해수욕장이 개장하지 않아서인지, 행락객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도로는 시원스레 뚫려 목적지인 변산면 대항리의 군산대 해양연구원까지는 전주에서 5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곳에서 1㎞를 더 가면 변산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과 인접해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주민들 떠난 폐어촌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마을 초입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한정식씨(68)는 “핵폐기장과 국립공원 때문”이라고 말한다.

“핵폐기장 얘기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려면 2~3번은 왔다가야 했지. 여관들도 잘 됐고. 하지만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진 뒤로는 그 많던 객지 손님들이 일절 발길을 끊었어. 저기 보이는 비O장, 파O장도 문 닫았지. 게다가 국립공원 구역으로 지정해놓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까 건물들이고, 시설들이고 다 쓰러질 지경이야. 청정 해역이라며 그렇게 많이찾던 손님들이 이제는 거짓말처럼 딱 끊겼어. ”

4년전 부안 전역을 뜨겁게 달궜던 방폐장 사태를 그는 머리 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연구원은 마을 끝 바닷가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뒷편에는 야트막한 산(언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왼편엔 서해바다가, 정면으론 백사장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수진(손예진)이가 철수(정우성)를 떠나 머물던 요양원이 이곳이다.

남편 철수가 찾아왔을 때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서 스케치북을 보고있던 수진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치매’에 걸린 수진은 지우개로 지우듯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가고,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철수마저 낯선 사람처럼 대하게 된 것이다.

-저 모르시겠어요?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최철수라고 합니다.

-….

CF를 보는 듯한 수려한 영상미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명대사들로 인기를 끌었던 이 영화 속에서 수진과 철수가 요양원에서 재회하는 신(scene)은 짧지만 강렬한 여운으로 남는다.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연수원 옆 바위 사이를 할머니 2명이 분주히 돌아다닌다. 파란 슬리퍼를 신고서도 바위와 바위를 능숙하게 옮겨다닌다. 가까이 가보니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굴을 캐고 있다. 목포에서 아들을 보러 왔다는 배일녀(72) 할머니는 ‘저새(굴 캐는 도구)’로 열심히 굴 껍질을 두드려 속살만 끄집어내 소쿠리에 담는다.

“물이 안뜬께(안빠져서) 굴이 별로 없구먼. 물이 떠야 많은디…. 이 굴은 독혀서 생것으로는 못묵어. 젓도 담꼬 지저묵꼬 뽂아 묵으야 맛나제.”

▲ 전주역의 철수.
톤은 다르지만 하늘과 바다 모두 흙빛이다.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만으로 구별된다. 무채색의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만들어내는 희미한 선 위에 하섬과 독섬(이곳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단다)이 꼿꼿이 자리잡고 있다. 옅은 안개속에서도 하섬이 더 뚜렷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더 가깝기 때문이리라.

하섬과 연수원 사이에는 어선 두척이 하릴없이 떠있다. 정박한 것은 아닌데 움직이지도 않는다. 비 갠 사이에 배는 띄웠지만 언제 장대비가 쏟아질 지 모를 장마철이어서 선주는 선뜻 어로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연수원을 나와 변산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변산은 해안도로에서 보는 바다와 백사장에서 보는 바다가 사뭇 다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릴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와 바위, 나무들은 충분히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막상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적잖이 실망한다. 허름한 상가들과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들, 탁한 바닷물, 잔잔한 파도….

1930년대에 개장한 유서깊은 해수욕장이라지만 나른하고 심심한 풍경은 십수년전과 똑같다. 두 세 무리의 때이른 행락객이 바닷물의 들고 남에 따라 움직이고, 상가의 여주인은 밖에 내놓은 건어물에서 파리만 날리고 있다. 큰 소나무 그늘 아래 듬성듬성 마련된 벤치에는 연인인 듯한 남녀가 등을 돌린 채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다.

돌아가는 길은 왼편에 바다를 두고 달렸다. 한낮이었지만 초저녁이라도 된 듯 어둑어둑하다. 자동차 전조등을 켜는 대신 속도를 줄였다.

<촬영 뒷얘기>


▲ 한국통신 앞.

이재한 감독이 전주를 찾기 전까지 도내는 주요 촬영지가 아니었다. 영상미를 강조하는 이 감독은 경남 합천을 주 무대로 생각하고 있었고, 전주영상위원회도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감독이 기차역 장면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전주를 찾았고, 이후 전주라는 공간이 갖는 이미지에 반해 주요 장면의 촬영지를 이곳으로 돌렸다. 크랭크 업(crank up·한편의 영화 촬영을 끝냄)도 전주에서 했다.

이 때문에 전주영상위와 스태프들은 촬영기간 내내 ‘총알같이 날아다녀야’ 했다. 도내에서 촬영한 40여일 동안 새벽에 헌팅하고 오전에 섭외해 오후에 촬영하는 강행군이 계속된 것이다.

▲ 남원의료원 응급실에서

특히 수진이 쓰러진 뒤 실려간 병원 응급실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수소문 끝에 개원한지 얼마 안된 남원의료원을 찾았고, 응급환자가 들어오면 무조건 촬영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밤샘 촬영이 계속됐지만, 다행히 응급환자가 없어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눈썰미 있는 관객들이라면 눈치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에는 마지막 장면에 ‘옥에 티’가 있다.
철수가 수진을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와 뻗은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영화 내내 눈물샘을 자극했던 관객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엔딩신이기도 하지만,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3차로는 될 것 같은 넓은 도로위에 차선이 없는 것이다.

전주~순창간 도로에서 촬영된 이 엔딩신은 도로가 개통되기 전이라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작진은 촬영 후 편집과정에서 CG로 차선을 그려넣기로 하고 촬영에 돌입했지만, 나중에 차선을 그려넣는 작업은 시간과 비용 면에서 만만치 않았다. 결국 제작진은 이 장면을 ‘옥에 티’로 남겨놓기로 결정했고, 차선을 그려넣지 않은채 개봉했다.

<어디에서 촬영됐나>


▲ 알츠하이머를 앓는 수진이 요양 하는 부분이 촬영된 부안 대항리 군산대 해양수련원.

불치병(알츠하이머)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손예진)와 그런 그녀를 지켜봐야하는 남자(정우성)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그린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주 촬영무대는 경남 합천이다. 철수와 수진이 결혼해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가는 신혼집 세트가 합천에 마련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극적인 긴장감과 반전을 가져오는 주요 장면들은 모두 도내에서 촬영했다.

도입부에 유부남과 함께 열차를 타고 떠나려던 수진이 오지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돌아서는 장면은 전주역에서 촬영됐다. 극중에서는 용산역으로 표현됐다.

▲ 전주시청 옆 현대해상 앞.

껄렁한 철수가 덥수룩한 수염에 먼지까지 뒤집어쓰고 일하던 공사장은 당시 신축중이던 도 신청사다. 효자동과 평화동, 서신동의 아파트 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진이 철수를 두번째로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수진이 철수를 가족에게 소개시키는 상견례장.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낀 수진은 화장실에서 나오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밖의 웅성거림에 철수가 달려나가고, 빗속에 쓰러진 수진을 철수가 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전주 서신동 E마트 맞은 편에 있는 계단이다. 또 철수가 수진을 데려간 병원 응급실은 남원의료원 응급실이다. 의식에서 깨어난 수진은 철수를 꽉 끌어안고, 철수가 못마땅했던 수진의 부모는 이때 둘의 결혼을 승낙한다.

▲ 군산대 해양연구원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무채색의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하섬과 독섬이 외롭게 서있다. 머리 속에서 기억을 지워가는 수진은 매일 서해바다를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결혼 후 자꾸 심해지는 건망증에 병원을 찾은 수진은 뜻밖의 진단 결과에 큰 충격을 받는다. 치매로 불려지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나온 수진은 멍한 얼굴로 도심 보도를 유령처럼 걷다가 한 건물 앞에서 주저앉는다. 전주시청이다. 수진의 옆으로는 한결같이 검은 정장 차림의 군중들이 무심하게 지나친다.

요양원에서 나온 수진과 철수가 시원하게 도로를 질주하는 영화 엔딩신은 개통되기 전인 전주~순창간 도로에서 촬영됐다.

/김종성기자 jau@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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